“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인해 청년실업이 50만에 육박한 이때에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 없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한 시트콤 속의 유행어는, 그로부터 석 달 뒤에 치솟은 국내 실업률을 예견한 것이었을까. 우리나라 실업률은 올 하반기 들어 4%를 넘길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물론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럽은 7%, 미국은 5%를 웃도는 실업률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 ‘취업난’은 국가도, 인종도 초월하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올 1월 미국 NBC에서 <백수탈출 성공기>(The Apprentice)가 제작된 것, 또 이 프로그램이 미국 내에서 크게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백수탈출 성공기>는 미국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58)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원조격인 <서바이버>의 연출자 마크 버넷이 손을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트럼프그룹의 CEO가 되기 위해 벌이는 참가자들의 고군분투를 담고 있다.

연봉 3억원의 CEO 자리를 잡아라

생각해 보라. 어느 날 당신에게 연봉 25만달러(3억원)의 CEO 자리가 주어진다면 어떨지. 게다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고작 자신이 얼마나 필요한 인재인가를 설득시키는 일이라면, 이보다 구미를 당기는 일이 어디 있을까. 그리하여 최후에, “자네를 고용하겠어!”(You're hired!)라는 말을 듣는다면. <백수탈출 성공기>는 당신에게 언제 찾아올지 모를 기회를 위한 유비무환의 지침서가 될 것이다.

이른바 ‘트럼프그룹의 CEO 찾기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백수탈출 성공기>는 방송 당시 미국에서 “자넨 해고야!”(You're fired!)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화제가 됐던 리얼리티 쇼다(트럼프 회장이 최종회에서 한 “You're hired!”역시 유행어가 됐다고 하면 <백수탈출 성공기>가 미국 내에 일으킨 파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CEO에 도전하는 16명은 남성팀과 여성팀으로 나눠 성대결을 펼친다. 진 팀의 사람들 중 한 명은 “자넨 해고야!”라는 말과 함께 군말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제작진이 이를 미리 경고했음에도 참가자 16명을 뽑는 오디션에는 21만명이 몰려들었다.

최종 참가자로 뽑힌 16명(남녀 각 8명씩)의 면면은 매우 다양하다. 하버드 MBA 출신, 백악관 전 보좌관, 벤처 캐피탈리스트부터 학벌이나 경력은 눈에 띄지 않지만 현장 적응력이 뛰어날 것으로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까지. 팀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혼자서 잘나서도, 그렇다고 눈에 띄게 못나서도 안 된다. ‘적당히’ 중간쯤을 유지하다 뒷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은 성공을 꿈꾸는 한국의 직장인들에게도 유용한 생존전략이 아닐는지. 치열하고, 치사한 심리전에 능한 자는 <백수탈출 성공기>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다.

이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는 뉴욕 거리에서 레모네이드 팔기였다. 판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목을 고르는 것이지만, 트럼프 회장은 “아둔한 자에게 목이 좋은 장소를 맡기기보다는 뛰어난 인재에게 그저 그런 장소를 맡기는 게 오히려 돈을 버는 길”이라고 말한다. 결과는 남성팀보다 유연했던 여성팀의 완승. 결국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는 평을 들은 한 남성 참가자가 탈락한다.

이후 주어진 미션은 개인 전세기업체인 ‘마르퀴스 제트’의 TV와 잡지용 광고를 제작하는 것. 남성팀은 광고 제작 경험이 있는 제이슨을 팀장으로 뽑아 승리를 다짐하지만, 결과는 또다시 실패. 남성팀은 이후 ‘지정한 물건을 최대한 저렴하게 구입해 오기’, ‘패밀리 레스토랑 경영하기’에서도 연달아 지고 만다. 패배 원인은 누가 보아도 분명하다. 여성팀은 평소 아옹다옹하다가도 경쟁에 임하면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역할 분담을 정확히 해 최고의 팀워크를 발휘하는 반면, 남성팀은 팀장이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항명하는 사례가 속출했던 것이다.

△  <백수탈출 성공기> OCN 수·목 오전 10시, 오후 7시50분

‘앞으로 남자는 절대 고용하지 말아야겠다’며 한숨을 내쉬던 트럼프 회장은 결국 남녀를 섞어 팀을 다시 짠다. 혼성팀이 처음 맡게 된 과제는 ‘밑천 1천달러로 벼룩시장에서 장사하기’. 특유의 우유부단함으로 어떤 선택도 내리지 못한 데다, 돈까지 잃어버린 크리스티가 최초의 여성 탈락자가 된다. 허나 트럼프 회장이 그를 지목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해 지금까지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든 죄.’ “자신을 지켜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대신 싸워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트럼프 회장의 평소 주장이다.

크리스티의 탈락은 팀원들이 그동안 감춰두었던 권력욕을 서서히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속으로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라도, 게임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협동심으로 승리를 거머줬던 여성들의 팀워크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서로를 이간질시키고, 편을 갈라 ‘왕따’를 시키는 남성 참가자들의 행동은, 비열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의 발판’이 된다. 그들의 혀에 여성들은 상처 입고, 전의를 점점 상실하고 만다.

참가자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해가는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과제는 여전히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뿐이다. ‘에이즈 재단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라’는 미션은 협상능력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유명 인사 5명과 접촉해 경매에 제출할 품목을 알아내야 하는 것. 제시는 팀원 중 협상능력이 가장 떨어진다는 이유로 탈락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트럼프 회장만의 기준이 있었다. “자네는 협상도 엉망이었지만, 팀원들의 부당한 대접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더 엉망이었지. 그 태도가 나약함으로 보이더군. 그럴 땐 맞서 싸우는 편이 낫지.” 낡은 아파트를 리모델링해 많은 돈을 받고 임대해야 하는 과제에서 태미는 ‘팀에 대한 충성도가 없다’는 이유로, 긴장감 때문에 미션 수행을 제대로 못한 에리카는 ‘감정에 치우쳐 결정을 내린 죄’로 해고당한다.

<백수탈출 성공기>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은 트럼프 회장과 게임에서 패한 팀원들이 나누는 대화다. 대부분의 탈락자는 이 토론장에서 한순간의 말실수로 결정된다. 게임에서는 이미 졌지만, 패배자들끼리 벌이는 최후의 생존 경쟁에서 자신을 어떻게 변론하고 보호하는가. 트럼프 회장은 이것 역시 CEO가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말한다.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참가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트럼프 회장이 왜 이 프로그램에 대해 “치열한 경쟁을 통해 신세대 경영자를 발군한다는 점에서 실제 비즈니스와도 유사하다”고 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부동산 재벌의 말·말·말…

<백수탈출 성공기>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샐러리맨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과 ‘태도’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연봉 25만달러가 끌리는 조건임에는 틀림없지만, <백수탈출 성공기>를 찾은 21만명의 한결같은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수십억달러의 빚에 허덕이던 회사를 뉴욕 부동산 개발업계의 최고 자리로 끌어올린 트럼프 회장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어서 지원했다.”

이 점이 <백수탈출 성공기>가 단번에 백만장자가 되게 해주는 여타 리얼리티 프로그램들과 다른 부분이다. 프로그램이 방점을 두는 지점은 ‘백수탈출’이 아닌 ‘성공기’다. 사냥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는 것. 트럼프 회장도 “이건 게임이 아니라 13주에 걸친 면접”임을 거듭 강조했다. 참가자들을 해고하는 트럼프 회장의 일갈은 어느 것 하나도 흘려들을 게 없는 명언들. 그의 충고를 깊이 새긴다면 날카로운 ‘구조조정’의 바람이 생각만큼 무섭지 않을 수도 있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