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N 2005-06-04 11:21]

[EBN산업정보 차기태 기자] 현대자동차그룹이 마침내 일관제철소 건설의 횃불을 들었다. 제철소 건설은 고 정주영 전 회장때부터 추진하다가 번번이 포기하던 대형사업이다. 그렇게 추진하다가 포기한 것이 벌써 3번이나 되니 이번이 3전4기의 도전이라고 할만하다.

현대차그룹의 제철소 사업은 우리나라 경제사에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포스코의 30년 독점체제가 붕괴된다는 것이 가장 크다. 포스코가 1970년대에 완공된 이후 우리 경제에 기여한 공로는 매우 크지만, 독점으로 인한 원성도 작지 않았다. 현대차그룹의 제철사업 진출에 우호적인 여론이 철강업계에 많은 것도 바로 그런 원성과 비판에서 비롯된다.
또한 그룹의 핵심기업인 현대자동차의 강판 수급도 좀더 원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그룹이 제철소 사업 진출을 결정하게 된 가장 큰 동기도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한 동기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해외진출이 가속화되고 국제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때문에 양질의 강판을 신속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제철소를 가까이 두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마 마음이 든든해질 것이다. 넉넉한 식량이나 자금을 비축해 둔 집안처럼.

하지만 동시에 불길한 생각도 떨쳐버릴 수 없다. 무엇보다도 현대자동차그룹의 자원과 여력이 충분한지 잘 모르겠다. 현재 갖고 있는 자원과 능력마저 엉뚱한데 날려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자동차는 굴뚝산업의 정수다. 한 나라의 기술과 생산성, 그리고 경영노하우가 집약되는 산업이다, 산업의 전후방연관효과도 최고다. 아울러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날이 새로운 기술과 생산성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때문에 기존의 세계 명문기업들도 끊임없는 연구개발과 투자로 자기혁신을 도모하고 있다. 최근에는 하이브리드차량 과 같은 연료절약형 자동차의 개발경쟁에서도 이들 명문 자동차기업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이런 명문 기업들과 피말리는 경쟁을 벌이면서 전세계의 소비자들에게 어필해야 하는 것이 자동차 산업이다.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현대차그룹의 제철소 사업 진출이 이런 과제에 부응하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제철소를 건설하고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수조원의 자금을 투자해야 한다. 소요자금과 기술의 일부를 외자유치로 해결한다고 해도, 그 부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 가벼워질 뿐이다. 이렇게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제철소에 투입하다보면 정작 자동차 분야에 투입될 자원을 유실시키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한정된 자원을 자동차에 집중 투자한다면, 현대차의 경쟁력이 더 커질것이 분명한데...

만약 거액의 자금을 투입해 제철소를 지어놓은 다음에 시황이 나빠지면 어떻게 될까? 새 제철소의 적자가 누적되고, 자동차 사업까지도 위험에 몰아넣지나 않을까? 이런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이런 의문과 함께 떠오르는 지난날의 경험과 교훈이 있다.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 재벌 들은 신규사업에 성공한 예가 거의 없었다. 현대그룹의 석유화학과 반도체, 삼성의 자동차와 유통, 엘지와 삼성의 신용카드, 에스케이의 증권 등등. 대체로 비극적 운명을 맞았거나 지금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는 인수한 사업보다는 창업한 사업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그 이전에 창업하거나 인수한 사업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 세계 유수의 기업으로 도약했다. 현대의 자동차와 조선, 삼성의 반도체, 엘지의 화학과 전자 등등. 그렇지만 이런 사업도 인고의 세월을 지내왔다. 정부와 국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그룹 안에서도 자원을 몰아주었지만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에는 그런 전폭적인 지원이나 자원 몰아주기가 어려워졌다. 대신 경제논리에 입각한 합리적 경영이 필요로 한 시대가 도래했다. 이를 무시하고 고집을 부린 끝에 닥쳐온 것이 1997년 외환위기였다.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 강요된 구조조정은 결국 경제적 합리성을 무시한 종전의 경영방식을 버리고 합리적 경영시스템을 구축해 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의 큰 기둥인 조선과 자동차, 기계 등 중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양질의 철강재 필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각종 석유화학 소재의 필요성도 마찬가지로 중요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그런 소재를 모두 국내에서 자급해야 할 시기도 지났다고 여겨진다.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오늘날 같은 개방화시대에는 필요한 소재의 일부는 해외에서 들여오는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그래야만 국내 관련업체에도 자극이 되고 경쟁력도 향상된다. 범용소재일 경우에 특히 그렇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소재를 들여와서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것다. 이를테면 면화를 들여와서 좋은 옷감을 만들거나 옷감을 수입해서 비싼 의류를 생산해서 수출하는 것이 좀더 유리하다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원유를 들여와서 석유제품이나 석유화학 제품으로 가공해서 수출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철강재를 해외에서 들여와서 기계나 자동차 선박 가전제품 등 고가상품을 생산, 수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전자산업에서도 반도체를 외부에서 조달해 고급 컴퓨터를 만들어 파는 것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이다.
국가경제의 이치가 이러할진대, 하물며 1개 기업이나 재벌의 경우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분명히 지금은 필요한 소재를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할 시대가 아니다.

이런 이치를 어기고 무분별하게 확장하려다가 실패한 사례가 적지 않다. 지난날 우리나라 재벌의 팽창과 파멸과정이 그런 역사다. 더욱이 철강과 석유화학 등의 산업은 거액의 투자를 필요로 하는 장치산업이다. 반면 시황의 변화가 극심해서 수익성을 담보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신규진출 업체의 경우 더 어렵다. 그러므로 소재산업에 대한 투자는 좀더 신중한 고려와 판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소재사업에 함부로 뛰어드느니 기존 사업의 경쟁력 강화에 투자하는 것이 좀더 많은 이익을 줄 가능성이 크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대차그룹이 새로 진출하려는 제철소 사업이 바람직한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제철소가 완공될 즈음의 철강재 수급상황이 우호적인지는 더욱 불확실하다. 최근 증권사의 한 보고서는 공급과잉이 초래 가능성을 전망하기도 했다. 만약 그 보고서 내용대로 완공시점에 공급과잉이 초래된다면 어려운 국면에 빠져들 가능성도 다분하다. INI가 최근 열연제품을 생산해서 공급 시작했지만, 중국산 제품의 수입이 급증해 시황이 몹시 어지러워졌다. 게다가 국내 내구경기 부진으로 앞으로의 시장상황은 더 악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때문에 INI의 수익성이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과연 현대 제철소에서 나오는 제품은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런데 현대차그룹의 주력기업 현대자동차는 국제신용등급상 아직도 투기등급에 머물러 있다. 더욱이 국제신용평가기관인 스탠다드앤푸어스(S&P)도 현대제철소 건설계획이 현대자동차 신용등급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므로 현대차그룹으로서는 현대자동차의 신용등급을 하루 빨리 투기등급에서 벗어나 투자적격 등급에 진입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다른 사업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국제경쟁은 치열하고 냉혹하다. 자동차산업은 특히 그렇다. 미국이 자랑하는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자동차마저 최근 투기등급으로 격하됐다.
이런 살벌한 경쟁을 이기고 대외신인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온마음을 다 쏟아야 한다. 여기저기 기웃거려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현대차그룹은 건설 광고 레저 등 온갖 분야에 손길을 뻗치고 있다. 그것도 정몽구 회장의 아들 딸들이 주도한다. 이렇게 해서 현대차가 공정한 경쟁풍토 속에 세계1류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기왕 제철소를 만들기로 했으면 그 일에 자원을 모아줘도 모자랄 터인데, 이곳저곳 자꾸 벌여 놓을 궁리만 하고 있으니...

현대는 과거 불도저식 추진력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런 추진력만으로 기업을 이끌어가던 시대는 아니다. 다행히 현대차그룹은 고로 2기를 한꺼번에 짓지 않고 시차를 두고 건설한다고 한다. 그나마 현명한 판단이라고 여겨진다. 한꺼번에 다했다가 시황이 좋지 않다면 큰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제철소를 지어야 한다면, 앞으로 시장상황과 국내외 경제동향을 면밀하게 주시하면서 신중하고 냉정하게 추진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자동차 사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차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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