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은행계 자산운용사 CEO였던 B사장. 그는 다른 회사로 옮기기 전까지 2년6개월 동안 CEO를 맡았고 업계에서 장수했다는 평을 들었다. 사실 자산운용업계의 CEO는 단명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오죽했으면 2년6개월 사장 자리에 있으면 장수했다는 평을 들을까.

최근 1년3개월 동안 퇴임한 자산운용사 CEO 중 실제로 3년인 임기를 다 채우고 퇴임한 CEO는 17.6%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2004년6월 이후 각 39개 자산운용사가 내놓은 정기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최근 1년3개월 동안 CEO가 바뀐 회사는 17개. 이 중 3년 임기가 만료돼 CEO가 바뀐 경우는 3개 회사에 불과했다. 나머지 14개 회사의 경우 1년6개월여 만에 CEO가 교체된 것으로 조사됐다. 어떤 회사는 3개월 만에 CEO가 바뀐 경우도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은행이나 대기업의 자회사인 자산운용사의 CEO의 교체가 잦았다는 것. 자회사 개념의 자산운용사는 두세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년~2년 만에 CEO가 바뀌었다.

◇ 모회사 입김에 사장자리 오락가락 = 자산운용업계 CEO가 단명하는 까닭은 많은 자산운용사들이 은행이나 증권사 혹은 대기업의 계열사로 모기업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자산운용사를 설립할 수 있는 최소 자본금은 100억원. 독립적인 형태로 자산운용사를 만들기에 적지않은 액수다. 결국 자회사 형태의 자산운용사는 구조적으로 모기업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 독립형 자산운용사 대표는 “대부분의 자산운용사는 독립된 회사라기보다는 모기업의 부속기업처럼 여기지는 경우가 많다”며 “모기업의 임원인사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경영진으로 내려오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져 왔다”고 설명했다. 지금과 같은 지배구조로는 모기업의 입김에 CEO자리가 좌지우지되고 CEO는 모기업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자산운용업이 일찍 발달한 미국의 경우도 모간스탠리와 골드만삭스, JP모간 등 미국 증권사들도 자산운용사를 자회사로 두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회사의 하위개념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로 자리잡았다. 정보와 인사 교류 없이 철저히 독립적으로 경영된다.

◇ 운용 철학 생길 틈 있나…= 잦은 CEO교체는 자산운용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자산운용업은 운용사의 철학과 운용 프로세스를 판다는 얘기가 있다. 운용철학에 따라 투자스타일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수익률도 달라진다. 결국 CEO의 투자철학은 종목선정이나 포트폴리오의 구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재순 제로인조사분석팀장은 “회사의 투자철학에 따라 인력구성이나 운용시스템이 달라진다”며 “CEO가 바뀐다는 것은 회사의 투자 철학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통상 CEO가 바뀌면 자금운용을 총괄하는 CIO(운용본부장)가 교체된다. 투자전략의 전면적인 교체가 불가피한 상황일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CEO가 단명하면 운용 철학이나 노하우가 쌓일 여유가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단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 부임한 CEO는 단기간에 뭔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한 대기업계 자산운용사 대표는 “CEO로 취임한지 6개월쯤 지나면 뭔가 확실한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마련”이라며 “장기적인 안목의 투자보다는 단기적인 성과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단명’과 이를 벗어나기 위한 ‘단기적이고 무리한 운용’이 악순환할 수 있다는 셈이다.

피델리티ㆍ뱅가드ㆍ템플턴 등 세계 유수의 자산운용사들은 CEO의 교체 없이 수십년간 같은 철학으로 운용됐고 그 철학을 믿고 투자자들이 돈을 맡기면서 성장했다. 이재순 팀장은 “미국의 경우 자산운용업이 오랜 시간을 거쳐 운용 철학이 만들어지면서 차분히 발전해 왔다”며 “CEO의 철학이 실제 자산운용에 스며들수 있을 만큼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