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향

2021-05-27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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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 바이블 2021].. <부제: 버핏이 직접 말해주는 투자와 경영의 지혜 2>

버핏이 평생 직업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항상 똑같이 해주는 조언
- 아직 여러분에게 적합한 평생 직업을 찾지 못했더라도 어딘가에는 그런 직업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직업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은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까요.
- 그러나 아무 직업에나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감동을 주는 회사가 아니라면, 존경스러운 사람이 없는 회사라면 생계 문제가 해결되는 시점에는 적합한 평생 직업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 아침마다 출근하려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는 직업을 찾아야 합니다.

- 이런 직업은 어딘가에 존재하므로 여러분은 계속 찾아야 하며, 그런 직장에서 여러분을 고용할 수 있도록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 이런 직업을 찾으려면 의사소통 능력개발이 매우 중요합니다. 글을 잘 써야 하고, 말도 잘해야 하며, 머리에는 지식이 가득해야 합니다. 전날까지 모르던 지식을 머리에 채워가는 하루하루는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버핏이 말하는 평생 계속해서 학습할 수 있는 방법
- 독서보다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호기심도 많아야 합니다.
- 간혹 사람들이 오직 한 사람과 점심을 먹을 수 있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느냐고 묻는데요. 사실은 독서를 이용하면 우리는 벤저민 프랭클린 등 역사상 위인과 점심을 먹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매우 오랫동안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다양한 사상을 배우는 호사까지 누릴 수 있습니다.
- 네브래스카 대학 졸업식 기념 인터뷰 2020-12-22

멍거가 말하는 인지편향을 피하는 방법
- 첫째, 내가 저지른 실수를 되새깁니다. 둘째, 최대한 핵심을 파악해서 단순하게 처리합니다.
- 자기 생각을 강하게 저지하고 방해하는 스타일이며, 무엇보다 멍청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 어리석은 실수를 피하려면 자신이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멍거의 다양한 가르침
-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인생에서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게임의 특징입니다. 실수를 피하려고만 하면 용기를 충분히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똑똑한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멍청한 사람들만큼도 예측을 못 합니다. 워런과 나는 매우 조심스러워서 이런 착각에 좀처럼 빠지지 않습니다.
- 훌륭한 투자자가 되려면 지식도 풍부해야 하지만 기질과 만족지연도 필요합니다. 참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투자에는 인내심과 공격성이라는 기묘한 조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둘을 겸비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명확한 자기 인식이 필요하며 자신의 능력범위를 알아야 합니다.
- 기질을 가르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효과적인 투자기법을 설명해주면 어떤 사람들은 즉시 이해하고 곧바로 받아들여 좋은 실적을 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주고 아무리 좋은 실적이 나와도 그 기법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즉시 이해하거나 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멍거가 말하는 향후 전망
문: 향후 10년 동안 주식시장의 수익률이 과거 10년보다 낮을 것으로 예상하나요?
답: 낮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이 매우 많아서 시장이 과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문: 양적완화와 댁규모 재정적자의 결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향후 그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나요?
답: 우리는 미지의 영역에 있습니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돈을 쩍어냈는데도 문제가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매우 위험한 불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이렇게 통화량이 증가하고 금리가 하락했는데도 아직 반응이 거의 없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답: 놀랍다는 표현으로 부족합니다. 경악스럽다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입니다.
- 칼텍 졸업식 기념 인터뷰 2020-12-14

문: 현재 시장 흐름이 닷컴 버블을 연상시킨다고 말하는 전문가가 많습니다. 당신도 현재 상황이 1990년대 말과 유사해서 <끝이 안 좋을 것>으로 보나요?
답: 끝이 안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문: 비트코인 가격이 5만 달러 되는 것과 테슬라의 기업가치가 1조 달러 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터무니없다고 보나요?
답: 새뮤얼 존슨은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벼룩과 이 중 무엇이 더 나쁜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도 어느 쪽이 더 나쁜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독일 속담이 있습니다.
- 사람은 너무 빨리 늙고, 너무 늦게 철든다.
우리는 모두 이 문제를 떠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자신에게 매우 너그러운데, 이는 십중팔구 좋은 일입니다.
- 데일리 저널 주주총회 2021-02-26

숙향

2021-05-2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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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드러커 자서전 Adventures of a Bystander in 1994]..

9번째 인물, 영국의 마지막 반체제자, 노엘 브레일스포드(Noel Brailsford)..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까지만 해도 유럽은 물론 미국까지 필명을 떨쳤던 인물이지만 1958년 사망했을 때는 영국에서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30년대 중반 드러커는 그의 아버지보다 몇 년 연상인 브레일스포드와 친구로 지내면서, 가끔 그가 사는 교외 주택에 가서 만찬을 즐기면서 대화를 나눴는데, 그보다 유쾌하고, 상대방에게 관심을 보이고, 힘을 복돋워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회상합니다.

브레일스포드가 가장 자주 인용한 작가는 볼테르였으며, 기독교 신앙과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는 볼테르 논쟁법의 특별판을 항상 머리맡에 두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연구원과 개별지도 강사로 출발했다.
1899년 보어전쟁은 그를 학문의 전당에서 끌어내 정치판으로 몰아넣었다. 여러 세대에 걸친 비국교도 교회 목사의 피가 흐르는 그는 양심의 문제에 침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단호하고 논리정연하게 전쟁을 반대했다.
이것은 인기가 없는 입장이었으며, 특히 보수적인 옥스퍼드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가 쓴 반전에 관한 글들은 영국의 주요 신문들 가운데 보어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 <멘체스터 가디언>의 사장인 스콧의 관심을 끌었다. 스콧은 그에게 <멘체스터 가디언>의 외교담당 논설위원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1912년 발칸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멘체스터 가디언>의 종군기자가 됐다. 발칸 제국에서 보낸 2년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을 것이다. 전쟁을 가까이서 관찰하기 위해 참전하는 군대마다 쫓아다니며 취재한 그는 전쟁에서 겪는 고통을 증오했으며, 그런 모습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는 자유주의 소수파로 발칸전쟁에 갔다가 사회주의 소수파가 되어 돌아왔다.

1913년이 저물어갈 무렵 발칸전쟁이 끝나고 몇 달 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즉시 전쟁을 반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평화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을 구분했다.
그리스인,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이 자신의 동포를 투르크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한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강대국들이 약간의 영토나 매장된 석탄 또는 영예를 위해 싸우는 전쟁은 그의 관점에서는 분명히 부당하고 실로 어처구니 없는 전쟁이었다.

그 때문에 <멘체스터 가디언>을 사임해야 했던 그는 몇 년 동안 직업과 수입 없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자기처럼 전쟁을 반대하는 소수파 사회주의자들과 힘을 합쳤다. 이들 가운데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도 없었고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그는 곧 그 구룹의 지적인 대변인이자 저술가가 됐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노동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그는 지역구 선거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공직을 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자와할랄 네루가 그를 찾아왔다. 방문한 이유는 자신과 간디가 인도 독립의 명분에 대해 쓴 글을 출판해 줄 수 있는 영국인 편집자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는 1920년 인도 독립을 지지한 최초의 영국인이 됐습니다.

그는 간디와 네루를 잘 알게 됐지만 신뢰하지 않았다. 네루는 너무 명석하고 간디의 종교적 발언과 냉혹한 정치활동의 조합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는 간디에 대해 크롬웰하고 비슷하다고 말했는데, 크롬웰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다.

1934년 36세나 연상인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아직 25세가 되지 않았는데, 그는 영어권에서는 정평이 난 저술가였고 저명한 언론인이었지만 나는 영국에 온 지 겨우 1년에 작은 개인금융회사의 증권분석가로 이제 막 제대로 된 직장을 잡은 때였다.

그는 파시즘과 나치즘이 꾸준히 지지를 얻는 것을 지켜보면서 점차 공산주의를 파시즘과 나치즘을 상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힘으로 생각하게 됐다.
영국과 제정러시아의 동맹을 반대하는 글을 써서 유명해진 바로 그 사람이 1930년경에는 영국과 소련공산주의의 동명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히틀러가 스탈린과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에 그는 공산주의와 결별했지만 다시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면서 공산주의를 두둔하는 등 한때 그와 동지였던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등을 돌립니다.
이제야 난 영국 국교회 반대파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알 거 같네. 크롬웰을 위해 스튜어트 왕조와 싸워 승리를 바쳤지만 그 뒤 크롬웰이 그들을 버리면서 너희들의 일은 끝났다고 말했을 때 말일세.

드러커의 총평: 20세기 현실의 반대자인 노엘 브레일스포드는 효과를 위해 자신의 양심을 권력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숙향

2021-05-26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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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 바이블 2021].. <부제: 버핏이 직접 말해주는 투자와 경영의 지혜 2>
- 2017~2021년 버크셔 연례보고서와 주주와의 문답을 정리한 책입니다.

나는 주식투자에 차입금을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주가가 단기간에 얼마나 하락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폭락이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녹색 신호등이 황색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적색으로 바뀌는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입금에 발이 묶이지 않은 사람에게 주가 폭락은 놀라운 기회입니다.

우리는 기원전 600년경 이솝이 한 말, <손안의 새 한 마리가 숲속의 새 두 마리보다 낫다>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도 아마존을 살 때 숲속에 있는 새가 몇 마리인지, 그 새가 손안에 들어오는 시점은 언제가 될 것인지 등을 생각합니다.
-> 이 우화가 정 반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숙향은 여전히 내 손안의 새 한 마리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투자심리가 불안정한 사람은 주식을 보유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시점에 주식을 매수하거나 매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조언에 의지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이 스스로 이해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면 남의 말에 휘둘리게 되니까요.
오늘이 매수에 적기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1~2년 보유하면 좋은 실적이 나올지도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20~30년 보유한다면 좋은 실적이 나올 것입니다.

증권업계에서 인덱스펀드를 권유하지 않는 것은 팔아도 돈벌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데스펀드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말은 <미국에 투자하는 시대는 끝났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숙향

2021-05-24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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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드러커 자서전 Adventures of a Bystander in 1994]..

8번째 인물, 나치즘이 불러온 개인의 비극, 헨슈와 셰퍼
- 헨슈는 드러커가 <프랑크푸르트 게네랄 인차이거>의 금융담당 기자로 일하던 당시 동료 편집자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나치 앞잡이 역할을 도맡아 괴물로 불렸다.
- 가진 게 없었던 그는 권력을 잡으려는 야망 때문에 나치의 중심부로 들어간 인물이었다.

- 셰퍼는 미국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중 나치의 만행을 막으려는 사명감으로 <베를리너 타게블리트>의 편집장을 맡기 위해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 나치의 권력에 이용만 당하다가 2년 후 숙청되는 비운의 인물이었고, 드러커는 그를 <어린 양>으로 표현했다.

1927년 가을, 나는 함부르크에 있는 무역회사에 견습사원으로 취직해서 처음 독일에 왔다.
15개월 후 월스트리트 증권 중개회사의 유럽 지점이 된 오래된 상업은행에 증권분석사로 취직해서 프랑크푸르트로 자리를 옮겼다.
- 1929년 뉴욕 주식거래소의 대폭락으로 끝을 맺었다.
1929년, 나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프랑크푸르트 게네랄 안차이거>에 금융기자로 채용됐다.
- 빠르게 승진해서 2년 후에는 외교와 정치 뉴스를 담당하는 선임편집자로 임명됐다.
- 같은 시점, 함부르크 대학 법학부에 입학한 나는 1929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옮겼으며, 1931년에는 국제법과 공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악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지만 인간은 평범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조건으로든 악과 흥정해서는 안 된다. 그 조건은 언제나 악의 조건이지 인간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헨슈처럼 악을 자신의 야망에 이용하겠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악의 도구가 된다.
셰퍼처럼 더 나쁜 짓을 막기 위해 악과 손을 잡을 때 인간은 또한 악의 도구가 된다.

나는 가끔 이 둘 가운데 어느 편이 더 해로울까를 생각한다. 괴물일까, 어린 양일까?
그리고 권력을 탐한 헨슈의 죄와 셰퍼의 자기과신과 오만의 죄 가운데 어느 편이 더 나쁜 것일까를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죄는 아마도 이 두 가지 고전적인 죄가 아닐 것이다.
가장 커다란 죄는 20세기에 새롭게 나타난 무관심의 죄, 아무도 죽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오래된 찬송가 구절처럼 <그들이 내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증언하길 거부한 저명한 생화학자의 죄가 아닐까?
* 생화학자:

숙향

2021-05-24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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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드러커 자서전 Adventures of a Bystander in 1994]..

7번째 인물, 헨리 키신저를 발굴해서 교육시켜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외교부 장관을 만든 프리츠 크레머입니다. 드러커 자신이 정치적 이단자임과 진정한 관심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야심을 지닌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부자인 어머니와 결혼해서 프리츠와 동생 빌헬름을 낳은 후 이혼했고 두 아들은 어머니가 맡았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돈의 힘으로 크게 성공했으나 평범한 출신 배경으로는 자유주의자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치 편에 섰고, 프린츠는 그런 아버지를 지조 없는 입신출세주의자라며 경멸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정확하게 간파했던 것처럼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융커 혈통과 보수적인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가장 교활한 혁명가이며 철두철미한 급진파였다. 비스마르크가 정리를 끝냈을 무렵, 그 모든 미덕과 악덕을 지닌 옛 프로이센은 허영심 강하고, 오만하고, 잘난 척하는, 졸부 같은 제국으로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 철의 재상으로 배웠던 비스마르크는 사욕 덩어리

2차 세계대전 중에 나는 크레머가 진정한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에 나치가 아니며 나치가 될 수 없음을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만 했다. 당시 크레머는 나치와 싸우기 위해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 미국 군사정보부는 여러 가지 타당한 이유에서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사관은 그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나를 계속 찾아왔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갔다.

그는 인생에 딱 두 가지 야망만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육군 참모총장의 정치자문이 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위대한 외무장관의 정치적 멘토가 되는 것이었다. 드러커가, 그렇다면 네가 직접 참모총장이나 외무상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 나는 내가 사색가이지 행동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 세간의 주목을 받거나 연설을 하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야.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 크레머는 법학공부를 마치고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독일에서 변호사 자격시험을 보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3년 동안의 법원연수를 받는 중이었다. 나치가 모든 유대인 판사와 사법연수생을 해임하라는 명령을 내린 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임한 뒤 곧바로 독일을 떠났다.
당시 자신의 어머니는 작은 도시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는 스웨덴 처녀 브리타와 갓 결혼한 상태였다.

독일을 떠난 후 이탈리아에 머물던 그는 1937년 혹은 1938년 무솔리니가 히틀러의 동맹자가 됐을 때, 신분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드러커는 그가 미국 워싱턴 소재 아메리칸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프리츠는 1939년 봄 미국에 도착했다. 그가 머뭇거리는 동안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터졌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 아들은 독일에 갇히고 말았다.

진주만 공격이 있고 며칠 후 크레머는 미 육군에 이등병으로 입대했고 첫 교전 후 곧바로 장교로 임관했고, 그 뒤로 빠르게 승진했다. 전쟁이 끝난 뒤 라인강을 처음 건넜던 미군 사단의 부사단장으로서 그의 어머니가 있던 작은 마을에 들어갔을 때, 기적적으로 그의 어머니와 아내, 아들까지 세 사람 모두 살아서 만날 수 있었다.

헨리 키신저는 독일 난민으로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돼 이등병으로 미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기본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한 일등병이 유럽 전쟁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일등병은 같은 독일인이었는데 프리츠 크레머라고 했다. 키신저의 질문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크레머가 나중에 그를 불렀다. 그 뒤로 키신저는 크레머의 문하생이 됐다.

크레머는 키신저가 하버드에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곳의 저명한 정치학 교수들이 애제자로 삼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키신저가 공부를 마치고 하버드에서 강의를 하게 될 때까지 그의 친구이자 멘토이며 고문역할을 해주었다.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은 어느 것이나 거부했던 크레머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거나 출판한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1929년에서 193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국제법 세미나를 듣던 시절, 우리가 함께했던 수많은 여유로운 시간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때 이미 그의 생각은 완전히 정리되어 있었다.

스스로 힘을 갖고 있으며 뒤에 힘을 남겨두는 지도자, 즉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자 진짜 <지도자>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이며 다르게 행동한다.
그는 사람들을 카리스마로 이끌지 않는다. 카리스마는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짜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노력과 헌신으로 이끈다. 모든 것을 손아귀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팀을 구성한다. 조종이 아닌 성실성으로 지배한다.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정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