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향

2021-05-24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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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드러커 자서전 Adventures of a Bystander in 1994]..

7번째 인물, 헨리 키신저를 발굴해서 교육시켜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외교부 장관을 만든 프리츠 크레머입니다. 드러커 자신이 정치적 이단자임과 진정한 관심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야심을 지닌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부자인 어머니와 결혼해서 프리츠와 동생 빌헬름을 낳은 후 이혼했고 두 아들은 어머니가 맡았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돈의 힘으로 크게 성공했으나 평범한 출신 배경으로는 자유주의자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치 편에 섰고, 프린츠는 그런 아버지를 지조 없는 입신출세주의자라며 경멸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정확하게 간파했던 것처럼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융커 혈통과 보수적인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가장 교활한 혁명가이며 철두철미한 급진파였다. 비스마르크가 정리를 끝냈을 무렵, 그 모든 미덕과 악덕을 지닌 옛 프로이센은 허영심 강하고, 오만하고, 잘난 척하는, 졸부 같은 제국으로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 철의 재상으로 배웠던 비스마르크는 사욕 덩어리

2차 세계대전 중에 나는 크레머가 진정한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에 나치가 아니며 나치가 될 수 없음을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만 했다. 당시 크레머는 나치와 싸우기 위해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 미국 군사정보부는 여러 가지 타당한 이유에서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사관은 그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나를 계속 찾아왔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갔다.

그는 인생에 딱 두 가지 야망만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육군 참모총장의 정치자문이 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위대한 외무장관의 정치적 멘토가 되는 것이었다. 드러커가, 그렇다면 네가 직접 참모총장이나 외무상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 나는 내가 사색가이지 행동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 세간의 주목을 받거나 연설을 하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야.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 크레머는 법학공부를 마치고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독일에서 변호사 자격시험을 보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3년 동안의 법원연수를 받는 중이었다. 나치가 모든 유대인 판사와 사법연수생을 해임하라는 명령을 내린 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임한 뒤 곧바로 독일을 떠났다.
당시 자신의 어머니는 작은 도시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는 스웨덴 처녀 브리타와 갓 결혼한 상태였다.

독일을 떠난 후 이탈리아에 머물던 그는 1937년 혹은 1938년 무솔리니가 히틀러의 동맹자가 됐을 때, 신분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드러커는 그가 미국 워싱턴 소재 아메리칸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프리츠는 1939년 봄 미국에 도착했다. 그가 머뭇거리는 동안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터졌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 아들은 독일에 갇히고 말았다.

진주만 공격이 있고 며칠 후 크레머는 미 육군에 이등병으로 입대했고 첫 교전 후 곧바로 장교로 임관했고, 그 뒤로 빠르게 승진했다. 전쟁이 끝난 뒤 라인강을 처음 건넜던 미군 사단의 부사단장으로서 그의 어머니가 있던 작은 마을에 들어갔을 때, 기적적으로 그의 어머니와 아내, 아들까지 세 사람 모두 살아서 만날 수 있었다.

헨리 키신저는 독일 난민으로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돼 이등병으로 미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기본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한 일등병이 유럽 전쟁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일등병은 같은 독일인이었는데 프리츠 크레머라고 했다. 키신저의 질문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크레머가 나중에 그를 불렀다. 그 뒤로 키신저는 크레머의 문하생이 됐다.

크레머는 키신저가 하버드에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곳의 저명한 정치학 교수들이 애제자로 삼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키신저가 공부를 마치고 하버드에서 강의를 하게 될 때까지 그의 친구이자 멘토이며 고문역할을 해주었다.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은 어느 것이나 거부했던 크레머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거나 출판한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1929년에서 193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국제법 세미나를 듣던 시절, 우리가 함께했던 수많은 여유로운 시간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때 이미 그의 생각은 완전히 정리되어 있었다.

스스로 힘을 갖고 있으며 뒤에 힘을 남겨두는 지도자, 즉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자 진짜 <지도자>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이며 다르게 행동한다.
그는 사람들을 카리스마로 이끌지 않는다. 카리스마는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짜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노력과 헌신으로 이끈다. 모든 것을 손아귀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팀을 구성한다. 조종이 아닌 성실성으로 지배한다.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정직하다.

숙향

2021-05-2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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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드러커 자서전 Adventures of a Bystander in 1994]..

6번째 인물, 폴라니 가(家)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초원하는 제3의 사회를 탐구했으며, 사회에 의한 구원을 믿었지만 그들은 그런 사회를 찾아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으나 개인적으로는 실패한 집안, 그 중 네째 아들인 카롤 폴라니와 드러커의 인연은 오스트리아-영국-미국까지 이어집니다.

1927년 겨울, 함부르크에 있는 무역회사 견습사원 4개월째였던 드러커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얻어 빈으로 돌아왔던 중, 고교 때 썼던 논문, <파나마 운하가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역할> 덕분에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 편집회의에 초청받아 참석하게 됩니다. 1시간 반이나 늦게 참석한 부편집장 카를 플라니(Karl Ploarny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회의가 끝난 후 그의 저녁 초대를 받아 남루하기 그지없는 그의 집으로 함께 귀가해서 생애 최악의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생활비를 걱정하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고요.

드러커: 편집회의가 끝나고 나올 때 우연히 폴라니 박사님의 월급을 보게 됐습니다. 그 정도면 누구라도 아주 잘살 수 있는 액수 아닌가요?
카를, 부인 일로나, 장모 그리고 8살 딸이 동시에: 아주 훌륭한 생각이군요. 월급을 자신을 위해 쓰다니! 우리는 그런 소린 생전 처음 들어봅니다.
드러커: (주눅 들어서)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요.
일로나: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논리적인 사람들이죠. 빈은 헝가리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어요. 공산주의를 피해서 온 사람들과 공산주의에 이어진 백색 테러를 피해서 온 사람들이에요.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없지만 카를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카를의 월급은 다른 헝가리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우리가 나가서 필요한 돈을 벌어오는 것이 논리적인 일이죠.

카를의 부친은 헝가리에서 가장 부유한 평민이라는 평판을 듣던 1868년 20세 어린 (러시아 백작이면서 무정부주의자)세실리아와 결혼해서 5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첫째, 오토: 공학자, 사업에서 성공, 마르크스주의자, 무솔리니 후원-실망, 냉소적인 노인네
둘째, 아돌프: 기술자, 철도사업으로 성공, 브라질에서 타락한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사회를 꿈꿨음
셋째, 딸, 무지: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25세에 결혼하면서 경력 단절. 이스라엘 키부츠 탄생에 한 역할
- 오펜하이머가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닌, 그러나 완전하게 사회주의인 키부츠의 원형과 유대인 사회의 청사진을 설계하는 데 이용했던 것은 고귀한 문화와 소박한 생활상을 지닌 전원적이고 평등한 농민공동체를 생생하게 묘사한 무지 폴라니의 소논문이었다.
넷째, 카를
다섯째, 마이클: 1891년생, 오토와 아돌프와는 20년 차이. 30세에 아인슈타인 밑에서 근무. 1920년대에 노벨상 후보로 거론됨. 히틀러를 피해 영국으로 가서 멘체스터 대학 물리학 교수가 됐음

카를: 20세가 되기 전에 헝가리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인 미카엘 카롤리 백작과 함께 헝가리 자유당 창설. 망명.
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참전했다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만난 간호보조사인 일로나와 결혼
전쟁에서 패한 후 망명에서 돌아온 카롤리가 헝가리 수상이 됐고 카를은 법무부 장관이 됐지만 6개월 만에 사회주의자들에게 쫓겨나 빈으로 망명.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 편집일을 했고 부편집장이 되었을 때 드러커와 만났음

드러커가 아버지에게 카를 폴라니를 편집회의에서 만났다고 하자, 아버지의 말씀..
- 아, 카를 폴라니, 그래, 한때 전도가 유망한 인물이었지만 결국 또 하나의 실패자가 되고 말았지.

카를은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한 영향으로 6년 후 실직했고 절친한 퀘이커교도 친구가 있는 영국으로 갔고 먼저 영국에 가 있던 드러커는 이 시기에 카를과 자주 만났고 일요일 아침마다 함께 산책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드러커 부부는 1937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후 카를은 미국에 들를 때마다 드러커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1927년 편집회의에서 카를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동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추측>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눈치채기 어려운 새로운 사태의 중요성을 초기단계에 간파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갖고서 사태를 분석했다. 그러나 빈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동안 그는 정말로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1941년 드러커의 소개로 카를 부부는 미국 베닝턴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일한 카를의 저서인 [위대한 변환]을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산업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려고 했다고 합니다.
- 영국 사회와 경제를 바꾼 것은 기계가 아니었다.
- 재화의 거래와 자본의 교환을 넘어서 또 다른 두 가지 생산요소인 토지와 노동, 특히 고용과 사람들의 생계문제를 포함하기 위해 <공급과 수요의 법칙>을 지닌 시장 시스템이 확대된 때문이었다.

1940년대 말에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 요청으로 경제사 강의를 시작해서 8년 동안 재직한 후 1956년 70세로 은퇴했다고 합니다.
- 고대 메소포타미아부터 아스텍까지, 그리고 다호메이의 흑인왕국부터 호메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까지 고대 원시경제를 연구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 그는 초기 경제학에 대한 이해와 원시적인 경제제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 그는 문화인류학과 경제선사학(先史學)에서 권위자가 됐다.

폴라니 가의 사람들이 특별한 이유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품었던 이상과 실패 때문이었다. 폴라니 가의 사람들은 각자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목표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사회에 의한 구원을 믿었다. 하지만 그 후에 사회에 대해 단념하고 절망했다.

숙향

2021-05-23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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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드러커 자서전 Adventures of a Bystander in 1994]..

5번째 인물, 트라운 트라우네크와 그의 아내 마리아 뮐뢰
- 사회주의자인 트라우네크 백작은 등산에서 친구를 구하려다 추락하면서 큰 부상을 입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살아남았지만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전사했다고 하는데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평생 죄책감에 살았고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킬줄 알았지만 오스트리아를 떠나지 않았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날 아내와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전쟁이 가져온 가장 큰 피해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우리의 희망을 파괴했다는 게 아니야. 그건 전쟁이 유럽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렸다는 거야. 전쟁으로 한 세대의 지배계층이 사라져버렸어.

피터, 그거 아니? 오스트리아에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정부를 구성했을 때, 그들이 내게 교육부 장관직을 제안했다는 사실 말이야. 그건 내가 늘 꿈꿔오던 자리였고, 게다가 나는 그 일을 맡을 준비도 되어 있었지.
하지만 나는 그 일을 맡을 수 없었어. 나는 단지 내 이런 시절의 친구들, 그리고 같은 이상을 갖고 있던 동지들의 죽음을 대가로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던 거야.

오늘날 제1차 세계대전이 얼마나 심각하게 유럽의 지도층을 제거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미국에는 거의 없다). 트라우네크 백작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몇 년이 더 흐른 뒤에서야 그것을 깨달았을 정도니 말이다.
나는 20대 초반에 커다란 신문사의 편집장이 됐는데, 내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내 앞의 세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숙향

2021-05-20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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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드러커 자서전 Adventures of a Bystander in 1994]..

4번째 인물,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에 대한 드러커의 신랄한 비판을 볼 수 있습니다. 8~9세쯤(1915~6년) 1차 세계대전 중 점심식사를 하러 갔던 공동식당에서 프로이트 가족과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을 때 부모님의 소개로 인사하게 된 게 유일한 만남이었다고 하네요.
그럼에도 그를 기억하게 된 이유는, 그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에도, 부모님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오늘 일은 잊어선 안 된다. 넌 방금 오스트리아에서, 아니 아마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만난 거야.

프로이트에 대해 알려진 3가지 거짓된 사실에 대해 완전 허상이며 이런 허상을 만들어 낸 것은 프로이트 자신임을 밝힙니다.
1. 프로이트가 평생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며 거의 빈곤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 어린 시절 프로이트는 아버지가 상인으로서 성공한 중산층으로 유복했으며, 파리 유학 시절에도 경제적 지원을 받아가며 안락한 생활을 했고, 젊은 시절 처음 의사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수입이 좋았다.
2. 반 유대주의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 프로이트가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히틀러가 그를 망명 보내기 전까지는 인종차별로 고통을 받은 적이 결코 없었다.
3. 빈에서 살던 시절에 빈 의학계가 프로이트를 무시하고 경시했다.
- 빈 의학계에서는 프로이트를 진지하게 고려했으며, 그만큼 많이 논의되고 연구되고 논쟁의 대상이 된 사람이 없었다. 다만 그를 거부했을 뿐이었다.

정신분석학이 치료가 될 수 있는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그것은 뉴턴의 물리학이나 칸트의 형이상학이나 괴테의 미학이 치료법이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프로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정신분석이 치료라는 것을 주장하려 했고, 대부분의 빈 의사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주장이었다.

정신분석은 소설이라는 예술에 그 누구보다도 큰 공헌을 했습니다.
- 토마스 만이 프로이트의 80세 생일에 초청 받아 했던 연설 - 프로이트는 분통을 터뜨렸다고 하네요.

프로이트의 저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가 성적 불안, 성적 불만 성기능 장애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19세기 말 빈(실제로는 유럽)의 다른 모든 기록에서 강조됐던 한 가지 신경증이 빠져있다.
바로 <금전 신경증>이다. 프로이트 시대 빈에서 억압의 대상이 됐던 것은 성이 아니라 돈이었다. 돈은 이미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상태였지만, 동시에 언급돼서는 안 될 대상이기도 했다.

프로이트의 시대에 빈에서 존경받는 부모라면 수입 문제를 자녀와 함께 논의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피하는 주제였다. 하지만 돈 문제는 양측 모두에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현재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그런 문제는 경제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어디에서든 일어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과학적인 합리성과 비합리적인 내면의 경험이라는 두 세계를 하나의 종합이론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다. 이런 통합으로 정신분석학은 그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지만, 동시에 그만큼 허약해지기도 했다.
서구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19세기의 체계(마르크스, 프로이트, 케인스)는 모두 과학과 마법을 통합시켰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숙향

2021-05-1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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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드러커 자서전 Adventures of a Bystander in 1994]..

3번째 인물은 드러커에게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가르쳐준 두 자매 선생님, 엘자(Elsa)와 소피(Sophy)입니다. 4학년 때 만난 선생님들로 엘자가 아버지에게 드러커를 상급학교인 김나지움에 진학하도록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5학년 때 또 한 명의 자매 선생님인 클라라를 만날 뻔 했다고 하네요.

엘자와 소피는 외모부터 성격, 가르치는 방식까지 대조적이었는데, 이를 통해 드러커는 선생님은 선생과 교육자로 구분했고 선생보다는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친구 누나가 피아노 레슨을 받았던,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인 아르투르 슈나벨과의 만남은 드러커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겼습니다. 그가 제자인 릴리에게 들려주는 가르침을 들어봅니다.
- 사랑스런 릴리, 너도 느꼈는지 모르겠구나. 너는 그 두 작품(모짜르트 소나타, 슈베르트 소나타)을 정말 잘 연주했다. 하지만 너는 네 귀에 들리는 대로 연주하지 않더구나. 단지 네 귀에 이렇게 들려야 한다는 식으로 연주했지. 그건 진실한 연주가 아니란다. 그리고 내 귀에 그게 들렸다면 청중들의 귀에도 들릴 거야.

드러커는 이 일화에서 배운 것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몇 년이 지난 다음인데, 마르틴 부버의 책에서 읽은 글귀 덕분이라고 합니다.
- 신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저지르게끔 만드셨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 배우려고 하지 마라. 다른 사람이 뭔가를 올바로 했을 때 그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
-> 어~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타인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방법을 독서라고 생각했는데, 타인의 성공에서 배워야 했군요^^

선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자신의 재능 가운데 가르치는 재능이 포함돼 있는 선생이 있는가 하면, 학생에게 학습을 프로그램해서 넣는 방법을 알고 있는 교육자가 있다.
선생은 타고난다. 그리고 타고난 선생은 자신을 향상 시키고 더 좋은 선생으로 거듭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자는 가르치는 방법을 갖고 있고, 그것은 학습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미스 소피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미스 엘자는 방법을 갖고 있었다.
소피가 깨달음을 주었다면 엘자는 기술을 제공했다.
소피는 비전을 전달했고, 엘자는 학습을 이끌었다.
소피가 선생이었다면 엘자는 교육자였다.

교육자는 학생들의 깨달음에 같이 도취됨으로써 열정을 얻는다. 학생의 얼굴에 떠오르는 깨달음의 미소는 어떤 마약이나 약물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교실에 만연된 무시무시하고 학생을 고사시키는 전염병인 교사의 권태감을 치유하는 것이 바로 이 열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