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3년, 꾹 참고 모아온 결혼자금 1억원, 전세금이라도 마련해 보려고 안 먹고 안 놀고 모은 돈입니다. 소위 이름 있는 증권사에서 전문가라 불린 사람들로부터 추천받아 멋 모르고 투자한 내 돈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억울해 죽겠습니다."

한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삼부토건 CP(기업어음) 투자자 사연이다. 건설사들의 잇단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기업회생절차(옛 법정관리)가 이어지면서 CP 투자자들의 불만이 들끓고 있다.

이들이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여러 사례가 있어 딱 잘라서 말하긴 어렵지만 담보가 없는 어음이라는 특성상 100% 보상은 거의 불가능하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문제가 된 LIG건설 CP 판매와 관련해 LIG투자증권, 우리투자증권 등에 대해 검사를 벌이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14일 "행정적인 절차를 통해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며 "투자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은 결국 민사소송을 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송을 하더라도 판매 과정의 불완전성을 투자자가 제대로 입증하지 못한다면 승소한다는 보장이 없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CP 발행을 둘러싼 제도적 허점이 한 원인이다.

신용도가 낮은 기업이 발행한 CP는 통제받지 않는 말썽꾸러기다. 발행과 유통 정보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발행잔액이 82조원을 넘어섰지만 유가증권처럼 증권신고서를 제출할 의무가 없다. 최종원 동양종금증권 연구원은 "CP는 발행하기 전에 사갈 사람만 구하면 개인적으로 돈을 차입하듯 발행되는 사례가 많다"며 "규제가 느슨하다보니 손쉽게 자금을 끌어다 쓰는 수단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현행 CP 시장은 발행기관, 중개기관, 투자자 사이에 적절한 보호장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행 한도조차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특정 기업이 마음만 먹으면 시장을 뒤흔들 수 있다.

지난 2003년 SK글로벌 사태 당시에 SK는 단기에 과도한 CP를 발행해 시장에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이후 CP가 편입됐던 머니마켓펀드(MMF) 환매사태가 불거지는 등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윤영환 신한금융투자 선임연구위원은 "CP는 과거 단자회사의 여수신 상품에서 유래했다"며 "형태는 여수신 상품이지만 유가증권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데 유가증권의 생명인 투명성이 결여돼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해 CP를 `단기사채`라는 새로운 제도의 틀로 옮기려고 하고 있다. CP는 어음이라 상법의 규제를 받을 뿐 투명성을 중시하는 자본시장법의 규제를 받지 않고 있다.

단기사채는 만기가 1년 이내로 발행되는 사채로 CP에 비해 여러 장점이 있다. CP는 어음을 실물로 발행해야 하기 때문에 위ㆍ변조 가능성 및 분실 위험이 있다. 발행, 유통 과정의 사소한 실수로 대형 사고가 터지기도 한다.

효성그룹 계열 진흥기업이 지난해 11월 발행한 200억원짜리 CP가 대표적인 사례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전산기록상 만기(올해 2월 초)와 어음에 표시된 만기(2월 말)가 서로 달라 생긴 일"이라고 말했다. 공교롭게 두 시점 사이에 진흥기업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며 개인투자자는 거액의 손실을 볼 상황에 처했다. 거래 과정에 참여했던 증권사들은 이런 실수를 파악하지 못해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이미 송사는 시작됐다. 금융감독원은 이번 건과 관련해 검사 필요성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단기사채는 실물 발행 없이 전자적 계좌부에 등록해 발행된다. 계좌부 간 이전 등록을 통해 유통되고 원리금 상환과 동시에 등록 내역이 전산상 삭제되기 때문에 이런 위험성이 없다. 발행 내역도 공개되기 때문에 시장 정보가 투명해진다.

윤영환 연구위원은 "CP 시장이 아무런 규제 없는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식 시장이라면 단기사채 시장은 고정적 터를 갖고 거래하는 제대로 된 시장"이라고 말했다. 단기사채는 이미 국회에 법안까지 올라가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4월 `단기사채 등의 전자등록법` 제정법안을 국회 정무위원회에 제출한 바 있다. 지난 1년여 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이 법이 최근 CP 사태로 다시 빛을 볼 전망이다.

국회 정무위는 오는 19일 공청회를 열고 입법 필요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다. 정부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단기사채의 최소 발행금액을 1억원 이상으로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만기도 1년 이내로 제한할 방침이다. 전자거래가 이뤄지므로 CP와 달리 초단기물 발행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2000년대 초반 일본이 단기사채법을 도입하고 나서 1년 반 정도 후에 CP를 통한 단기자금이 단기사채 형태로 크게 바뀌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