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금융회사들의 고민: 백화점과 전문점>
이제 며칠만 있으면 2005년이 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연구실은 절간 같
이 조용하지만 바깥세상은 황우석 교수 사건으로 몹시 시끄러운, 그래서 우
울한 연말이다. 어느 모임에 가도 대화주제의 제 1 순위에 올랐던 이 사건은
온 국민들의 생명공학 지식수준을 높였다는 우스개 소리와 더불어, 대한민국
에 신뢰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학문의 세계가 시장바닥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하는 자괴감을 던져준 큰 아픔이 아닐 수 없다.
금융권에서도 한 해를 넘기면서 각 권역별로 새해를 맞는 준비로 부산함
을 느낀다. 은행은 올해 큰 이익을 냈다. 외형상으로만 보면 참으로 행복했
겠지만 이익의 질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올해 대폭 이익의 실현은
예상손실에 대비하여 쌓는 대손충당금 부담이 크게 줄어든 때문이지 영업이
익이 급증했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영업이익 측면에서는 대출 규모
가 줄어드는데다가 순이자이익(net interest income)이 함께 감소 추세를 보
이고 있어 장기적인 은행의 영업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은행은 이의 타개책으로 여타 금융권 업무의 겸업(兼業) 또는 겸영(兼營)
을 통해 새로운 이익원을 찾고자 하나 이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다. 방카슈
랑스를 통한 보험업무, 신탁 및 자산운용업 확장 진출, 파생금융상품의 판매
등에 관한 논의가 무성하지만, 과연 이들이 은행 예대업무의 부진을 상쇄할
만큼 충분한 수익을 향후 창출해줄 것인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은행 입장에서 겸업 또는 겸영이란 한때 인기를 끌었던 ‘비디오가 함께 붙
은 텔레비전 세트’에 비유할 수 있다. 요즘 세상에 대부분 사람들이 텔레비
전과 비디오는 가지려고 하니 이 두 가지를 함께 묶어서 출시된 상품은 개
념상으로 그럴 듯 해보였지만 막상 시장에서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던 것
같다. 텔레비전과 비디오, 각각의 부문에서 경쟁력을 갖는 회사가 서로 다르
다는 것, 그리고 한 가지만 고장이 나도 물건을 통째로 갖고 가서 고쳐야만
하는 부담 등이 그 원인으로 생각된다.
은행의 겸업 또는 겸영도 그럴 것 같다. 전통적으로 예대업무에 강한 상업
은행들이 보험, 신탁, 자산운용, 파생상품 분야에서도 잘 할 것이라는 시장의
확신이 없다. 또한 이들 중 한 가지에서만 잘못되어도 이것이 회사 전체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이른바 ‘전염효과’에 대한 우려도 무시할 수 없다.
탈은행화(dis-intermediation)와 증권화(securitization)은 한때 금융권의 화
두(話頭)였으며 지금도 그 추세가 크게 역전되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장기적
으로 은행의 입지를 크게 위협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이상 두 가지 추세에도
불구하고 국내 은행들이 증권, 보험 등 타 금융권역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굳
건한 경쟁우위를 오늘날 갖게 된 것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가장 과감
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뼈를 깎는 아픔으로 수많은 임직원들
을 내보냈으며 은행 간 인수합병을 통해 규모의 효과를 추진하였고, 증권회
사 또는 외국계 회사에서 CEO를 영입하는가 하면 아예 은행을 외국에 팔기
까지 하였다. 아프락사스의 알을 깬 국내은행은 더 이상 철밥통이 아니다.
그러나 은행 입장에서 이제 구조조정의 약발은 거의 소진되어 가는 것 같
다. 탈은행화와 증권화의 추세는 은행의 현재 수준을 넘는 더 이상 약진(躍
進)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은행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외환위기 이후 시장에 지속된 안정희구성향(flight to quality)
이었다. 아직까지 금융시장에 강하게 존재하는 이 성향은 그러나 최근의 주
식시장 활황 및 실물투자 인기 급등과 더불어 점차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하여 최근 발표된 한국판 투자은행인 금융투자회사(가칭) 설립 추진
계획은 (상업)은행의 기존 입지를 위협하는 결정적 촉발(triggering) 요인이
될 것이다.
한편 시장의 게임은 항상 상대가 있는 법이므로, 이상의 예측이 들어맞으
려면 증권회사나 보험사가 합당한 대응을 한다는 것은 전제로 한다. 상업은
행의 예대업무는 ‘지는 해(sun)’는 분명 아니다. 금융업이 존재하는 한 시장
의 분명한 한 축을 담당할 것이며. 만족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적정 이윤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부가가치는 투자은행을 통해 창출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현재 중개업무(brokerage) 중심의 대부분 증권회사
들이 인수합병 및 대폭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투자은행과 순수 중개전문 증
권회사로 양분되어 재탄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증권회사들이 이러한 적극
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은행의 상대적 입지 약화’라는 필자의 예측은 틀릴
것이며, 따라서 은행은 지금의 우월적 위치를 한동안 더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부가 투자은행 양성화를 위한 ‘멍석’을 활짝 깔아주었는데도 불구
하고, 그 위에서 놀지 못한다면 국내 증권회사들에게 희망을 찾기는 어렵다.
반대로 증권회사들이 기대에 부응하여(!) 적절한 대응을 한다면 이는 은행에
게 큰 위협이 될 것이다.
보험회사는 은행과 증권에 주어지는 혜택들(?)에 걸 맞는 보상으로 어슈어
뱅크(assure-bank)를 내심 원할 것이다. 여신업무에 따른 신용리스크를 부담
하지 않는 내로우뱅크는 특히 대형 보험회사들이 은행에 맞서 견줄만한 경
쟁력을 확보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은행이 겸업
및 겸영을 통해 적극적으로 치고 나오는데 보험회사에도 합당한 대응책으로
어슈어뱅크를 허용해주어야 한다는 보험업의 목소리는 그러나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시장의 지배적 논리에 압도되어 당분간
은 실현 가능성이 의문시 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하여 보험업이 다른 권역
으로부터 당장에 크게 위협받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보험수리(actuarial
science) 영역은 다른 권역에서 쉽게, 단시간 내에 정복하기에는 나름대로 만
만치 않은 영역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험업은 스스로 다른 권역으
로 쉽게 쳐들어가지도 못하지만 쉽게 침범 당하지도 않는 '섬(island)'과 비
슷한 입지를 한동안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은행, 증권, 보험 각 권역에서 공통적 당면과제는 금융시장이 생산자 중심
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급속하게 변화하는데 적합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수요
자 중심의 시장 재편(再編)은 수요자인 투자자들 입장에서 효율적 투자곡선
(efficient frontier)의 확장, 즉, 주어진 리스크 대비 기대이익의 증가라고 하
는 긍정적 효과를 창출하지만, 반면에 금융회사들 입장에서는 무한경쟁으로
내몰리는 셈이 된다. 이때 금융회사들은 다양한 업무를 겸업 또는 겸영하는
유니버살 뱅킹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가장 경쟁력을 갖는 특화된 업무만
을 하는 전업주의(專業主義)를 택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은 백화점과 전문점의 차이에 비견할 수 있다. 최근 유통업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동네 구멍가게 및 재래시장이 극심한 어려움에 처한 반
면 백화점들은 연일 호황을 누린다는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다양한 상품들을 한 몫에 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게 와 닿은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눈 여겨 볼 것은 백화점과 재래시장과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도 다양한 전문점들이 나름대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면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금융시장에서도 재래시장이나 동네 구멍가게에 비견되는 회사들은 앞으로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갖은 이유를 들어 이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
는 목소리가 많지만 커다란 시장의 흐름은 이를 무시하고 결국 백화점과 전
문점의 양 대 산맥을 구축해 갈 것이다. 따라서 각 금융회사들은 백화점이
냐, 전문점이냐의 양자 갈림길에서 선택의 고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금융상품의 유통, 마케팅, 고객충성도 확보에 강점을 갖는 회사들
은 판매, 겸업, 겸영 중심의 백화점식 체제를, 그리고 금융공학을 통한 신상
품개발, 자산운용, 파생상품 및 리스크관리에 강점을 갖고 있거나 보험회사
처럼 독자적 영역을 이미 확보한 회사들은 전업주의로 전문화를 택할 가능
성이 크다.
‘주먹을 꽉 쥐면 그 안에 아무것도 없지만, 주먹을 펴면 그 안에 세상이
있다’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에 나오는 대사의 한 구절이다. 지금 이 순간
각 금융회사들이 놓칠까봐 두려워 꽉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이를 버렸을
때 새롭게 열릴 세상에는 어떤 새로운 기회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2006년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백지(白紙) 일기장의 선물이다. 그 하
얀 속지에 우리 모두가 어떤 글을 써갈지 자못 궁금한 가운데 올 한 해도
이렇게 마감한다.
(끝)

출처 : http://home.ewha.ac.kr/~jh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