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사포처럼 빨리 말하고 길게 말하고 뭉개서 말하고.
그것을 자막없이 화면을 보면서 들으면서 동시에 받아 적어 오는 것이 숙제 중에 하나였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은 지 한 사람의 대사가 무척 길기도 했다.
처음엔 쉬운 부분부터 시작해 나중엔 알아 듣기 어려운 곳이 과제로.
검사 받고 돌려 받고 그렇게 몇 주가 지나. 그러던 어느 날.
공책을 빤히 보던 선생님, "글씨 참 알아 보기 힘드네요." 정색하고 냉랭하게 한 마디 하셨다.
여태 참았던 모양이다. 하긴 줄도 없는 공책에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글씨들. 내가 심하긴 심했지.
왜 몰랐지? 남은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한 마디 들을 것이라는 것을. 나름 이유는 있다.
왠지 차분히 다시 옮겨 적으면 베낀 것처럼 보일 것도 같았고,
옮겨 적다 보면 그새 자막을 보고 확인하고 싶은 맘이 생길까 봐,
나 아닌 내가 튀어 나와 놓친 부분을 사전을 뒤적이며 알아 들은 듯 슬쩍 끼워 넣을까 봐.
자막없이 사전도 찾지 않고 받아 적은 그대로 따끈하게 제출하는 것이 가장 충실한 게 아닐까 하고.
깨끗하게 다시 적을까 하다가 일부러 그대로 가져간 건데.
하지만 이런 내 맘에 선생님이 관심 없을 수도 있다는 것.
성인 20여명이 앉아 있는 교실. 숙제 검사 때문에 여지없이 조용한 가운데 글씨가 엉망이라는 그 말은 상처였다.
어린이가 아닌 어른도 상처를 받는다. 칭찬을 좋아하고.
실력과 배려가 늘 함께 짝 지어 다닌다는 생각을 버릴 때도 됐는데.
속마음이 짓밟힐 일은 이것 말고도 엄청나게 많이, 자주, 크게 일어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시금치 밭에 시금치보다 많은 잡초처럼 꿋꿋하게 버텨야지.
선생님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그 분의 마음 상태가 느껴진다.
난 내가 알아 주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누군가의 심정도 알아 주고.
뭐든 열심히 하면 어디 가겠어. 마음 안에 차곡차곡. 요것이 진정 남는 장사지 말이야.
누군가 숙제 비슷한 것을 내기만 하면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순진하게 열성을 다하는 것도 병이리라.
그리고 얼마 후, Awesome~!을 우리말처럼 평탄하게 했다고 혼났다. 그게 Awesome이냐고.
학생은 강사를 고를 권리가 있다. 강사도 학생을 고를 권리가 있을까?
그러지 말고 다음부터 새로 깨끗이 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