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일단 발길이 얼어 붙는다. 그 다음에 손을 더듬어 전기 스위치를 찾는다. 불이 켜지면 그제서야 안정을 되찾고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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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주요 중앙은행들이 취한 ‘무제한 유동성 공급’이라는 처방이 기름을 더 끼얹은 꼴이 되었다. 사상 최대의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을 보니 사태가 보통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정말로 운명의 그 날이 온 것일까?
지금까지 밝혀진 각종 소식들을 종합해 보면 분명 땅이 꺼진 것은 아니다. 미국 주택 담보 대출 금액이 약 10조 달러. 그 중에서 서브 프라임 론에 해당하는 규모가 대략 1조에서 1조 5천억 달러, 이중에서도 연체가 되고 있는 부실 대출이 약 1500억 달러에서 많게는 2000억 달러.
그러나 주택담보 대출이라는 것은 집을 담보로 한 것이니까 연체가 되더라도 집 자체가 날라가는 것은 아니라서 시간의 문제지 최소한 50% 이상은 건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서브 프라임 론을 기초자산으로 해서 제조한 신상품이 얼마나 되는지 또 이를 편입한 금융 기관이 얼마나 피해를 보고 있는지 정확하게 추산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포가 또 다른 공포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얼마 전 한 기사에서 월가의 유명 투자은행과 헷지펀드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우화적인 그림을 실은 적이 있다. 누군가 먼저 총을 쏘면 서로 방아쇠를 당겨 다 같이 죽는 형국이다.
과연 누가 방아쇠를 먼저 당겼을까? 아마 조만간 사태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각 중앙은행이 무제한 유동성 공급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낸 이상 금융 시장은 일단 진정되는 국면으로 들어갈 것이고 남은 일은 정확하게 서로가 어떻게 물리고 물고 있는지 밝히는 작업이다. 후유증은 오래 갈 수 있지만 결론은 쓴 웃음이 나는 한 편의 블랙 코미디가 될 것이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운다.
첫째 인간의 공포심 앞에서는 첨단 리스크 관리 시스템이라는 것이 ‘꽝’이라는 사실이다. 이럴 때 작동하라고 그 많은 돈을 들여 구축해 놓은 리스크 관리 시스템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둘째 복잡한 금융상품일수록 위기 시에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결국 신뢰가 깨어지면 컴퓨터 모델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음이 완벽히 증명된 지금 안전한 금융 시스템 구축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불가피할 것이다.
아직 위기가 수습된 것은 아니지만 와중에 묘한 자신감(?)을 갖는다. 선진 금융기관들의 수준이 겨우 이 정도라는 것을 안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차분히 사태를 지켜보자. 설사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동공이 확대되어 방안의 모습은 대충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눈이다. 기다리면 된다. (이상진 신영투신운용 부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