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Bay Area” 라고 불리는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넓게 자리잡은 실리콘 밸리. 이곳 실리콘 밸리에서는 “기술을 다루는 사람들”, 이를테면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나 박사과정 학생들 또는 세계 이곳 저곳에서 저마다의 뛰어난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들고 이곳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 벤처캐피탈 (VC) 로 대표되는 “돈을 다루는 사람들”과 만나서, 사람들의 생활 양식을 바꿀 수 있는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서 오늘도 열띤 논의를 벌인다.
그런데 한가지 볼 수 있는 점은, 이곳에서는 때때로 “기술을 다루는 사람들”과 “돈을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기술을 다루는 사람들도 펀딩과 IPO에 대해 속된 말로 “빠삭하고”, VC 들 역시 기술에 대해서 문외한이지 않은 곳이 실리콘 밸리다.
때로는 기술 쪽에 있던 대표적인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VC 로 타이틀을 바꾸어 달고 나타나는 경우도 흔하다. 실리콘 밸리에서 존 도어 (John Doerr) 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VC로 꼽히는 인도계 미국인 비노드 코슬라 (Vinod Khosla) 는 선마이크로시스템즈의 창업 멤버 중 한명이었다. 또한 최근까지 썬에서 CTO로써 “비저너리” 역할을 담당하던 빌 조이 (Bill Joy) 는 실리콘 밸리에서 가장 유명한 벤처캐피탈 회사이자 비노드 코슬라와 존 도어가 몸담고 있는 클라이너 퍼킨스 (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 의 VC 로 금년 1월달에 자리를 옮겼다.
그런가 하면 또다른 썬의 창업멤버 중 하나인 안드레아스 벡톨샤임 (Andreas von Bechtolsheim) 의 경우에는 VC 에서 다시 썬으로 복귀한 경우이다 (최근 자신의 벤처 회사인 Kealia 를 썬에 다시 팔면서 썬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벡톨샤임은 자신의 스탠포드 박사과정 후배인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에게 20만불을 투자한 적이 있는데, 최근 구글의 IPO 로 인해 그때 투자한 20만불이 7억불로 불어남으로써, 포브스 400대 부호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처럼 실리콘밸리의 주연들은 “기술” 진영과 “돈” 진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게 보통이다. 중요한 건 이노베이션을 몇 건이나 만들어 냈냐이지, 타이틀이나 소속이 아닌 것이다.
이는 주변의 학교 (스탠포드, 버클리) 에도 영향을 미친다. 야후의 창업자들과 마찬가지로 구글 창업자들도 스탠포드 박사과정을 중퇴하고 벤처 창업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둔 경우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장 박사과정을 그만두면 군대 문제가 걸리는 사람들도 있고, 설령 군대 문제가 해결되었더라도 박사과정 중퇴 상태로 대기업에 취직할 경우 박사를 마친 동기들에 비해 상당히 뒤쳐진 상태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다른 대안이 많지 않음으로 인해서, 박사 취득-국내 대기업 취직으로 이어지는 교과서적인 루트를 크게 벗어나기가 힘든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러나 스탠포드에서는 박사과정 중에라도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이 발견되면 남들이 그것을 현실화 하기 전에 빨리 창업하는 게 더 유리한 길이라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교수들도 세상과 담쌓고 선비처럼 살기가 조금은 어려울 것 같다. 요즘 엔젤 투자가로 활동하고 있는 데이빗 셰리턴 (David Cheriton) 교수를 보자. 자신의 제자 두 명은 구글을 창업하여 억만장자가 되었다. 그 전에 가르쳤던 학생인 벡톨샤임은 썬의 창업멤버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동료 교수들은 SGI (실리콘 그래픽스) 나 씨스코 같은 회사들의 창업 멤버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그도 인간일진대 아마 “앗, 나는 뭐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셰리턴 교수는 제자 벡톨샤임과 함께 그래나이트 시스템즈 (Granite Systems) 를 창업, 이를 시스코에 팔았고, 최근엔 구글의 IPO 과정에서도 자문가로써 자신의 제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결국 돈을 가진 사람,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 할 것 없이, 이들은 한 동네에 살면서 매일같이 하는 일이 세상을 바꿀 아이템이 무엇인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최근에 눈여겨 보는 분야 중의 하나가 모바일 엔터테인먼트 쪽이다.
CES 2005 에서 볼 수 있었던 다섯가지 경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컴덱스가 가장 유명한 IT 관련 전시회였으나, 이제는 CES (Consumer Electronics Show) 가 그 자리를 대체해 가고 있다. 얼마전에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CES 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다섯 가지 분야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출처: KIPA “게임 이슈 리포트”, (2005년 2월)
- 미디어 서버
- 휴대형 엔터테인먼트
- 하이브리드 가전
- 혁신적인 게임기
- 텔레매틱스
결국 이러한 관찰을 통해 하나의 메가 트렌드를 도출해 본다면, 예전에는 “컨텐츠” 를 즐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다분히 한정되어 있었지만, 이제 그러한 컨텐츠 이용의 시-공간적 제약을 없애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학문을 연구하는 박사들이 결국에는 하나의 진리의 원류에 도달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박사를 Ph.D. (Doctor of Philosophy) 라고 부르듯 (물론 M.D.나 J.D.도 있지만), 때로는 IT 트렌드의 서로 다른 부문에서 일어나는 혁신들이, 기본적으로는 상당히 동일하게 어떤 시대 트렌드 변화에 기초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컨텐츠를 언제, 어디서나 즐기려다 보니 필요해진 것이 컨텐츠의 디지털화, 모바일화이며, 이로 인해 위에서 열거한 미디어 서버 (거실 안), 휴대형 엔터테인먼트, PSP 등의 혁신적 게임기 (이동 중), 텔레매틱스 (차 안) 등의 기술이 대두되는 것이다. 이 역시 말단부 혁신들은 서로 다른 부문에서 일어나지만, 기본적으로는 미디어 혁명이라는 동일한 트렌드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몇년 전 VoIP 가 부각되면서 향후 모든 음성 통화가 IP 기반으로 컨버전스 될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듯, 현재 전 부문의 엔터테인먼트 컨텐츠가 디지털화 (IP화) 및 모바일화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이러한 미디어 혁명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다.)
CES 는 향후 12개월의 트렌드를 미리 나타내 준다는 점에서, CES 쇼에서 휴대 엔터테인먼트가 강조되었다는 것은 미국의 자본 시장이 모바일 엔터테인먼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음을 시사해 준다. 일례로 모바일 게임 업계에서는 기업공개와 인수합병이 계속 진행중인데, 당연한 얘기지만 기업공개와 인수합병의 이면에는 자본 시장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M&A는 IPO와 더불어 양대 exit strategy 이다.) 쓰이는 잠닷 (JAMDAT) 이 나스닥 IPO 에 성공했으며, 수메아 (Sumea)가 EA 출신이 창업한 디지털 초콜렛에, 아이오모 (IOMO) 와 엘크웨어 (Elkware)가 인포스페이스 (Infospace)에 각각 인수되었다. 소렌트(Sorrent)와 매크로스페이스 (Macrospace) 는 상호 합병하였다.
폰바이츠의 “래즈(RAZZ)”
미국에서 모바일 컨텐츠 쪽의 기업이 신규 투자를 받는 케이스는 최근 들어서 심심치 않게 눈에 띄고 있다. 필자의 졸고에서 소개한 업체로써, 인터넷에 연결된 PC의 HDD를 무선 미디어 딜리버리 센터로 탈바꿈 시켜주는 오브 (Orb Networks)나, 무선 위치기반 서비스 제공사인 웨이브마켓 (Wavemarket) 등도 최근 투자 유치에 성공하였다. 여기서는 금년(‘05년) 초에 투자받은 한 예로써 “폰바이츠
(PhoneBites)”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모바일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표방하는 미국의 창업 기업인 폰바이츠(PhoneBites) 사는 얼마전 300만불의 초기 투자 (First round funding) 을 유치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폰바이츠가 갖고 있는 기술은 (현재 특허 출원 중이라 함) 래즈 (RAZZ) 라고 불리는 기술로써, 휴대폰 통화 중에 또는 음성 메시지를 남길 때 배경음악을 삽입해 준다. 애인과 통화할때는 감미로운 배경음악이 깔리고, 직장 상사가 임직원에게 전화할때는 씩씩한 행진곡이 배경에 깔리는 식이다.
실리콘 밸리 지역의 뉴스인 “머큐리 뉴스 (The Mercury News)” 에서는 래즈에 대해, 링톤 (벨소리) 과 링백톤 (컬러링) 이 모두 히트를 친 걸 감안하면 래즈 역시 히트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Following the success of both ring tones and ring backs, the RAZZ has been considered by industry pundits to be the next big hit in mobile entertainment.”) 사실 사람들은 대화 중에 음악이 흐르기 원한다. 예를 들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 아무런 배경음악이 나오지 않으면 십중팔구 음악을 요청하게 된다. 따라서 휴대폰 통화시 배경음악을 원하는 사람들도 꽤 되리라는 전망인 것이다.
폰바이츠에 300만불을 투자한 회사는 거라지 테크놀로지 벤처 (Garage Technology Ventures), 카디널 벤처 캐피털 (Cardinal Venture Capital), 지멘스 모바일 액셀러레이션 (Siemens Mobile Acceleration) 등이다. 이중 Garage Technology Venture 는 한때 애플에 몸담았던 유명한 일본계 미국인인 가이 가와사키 (Guy Gawasaki) 가 현재 이사로 있는 곳이다. (기술쪽에 있던 사람이 VC 로 자리를 옮긴 또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역시 머큐리 뉴스에 따르면, 가이 가와사키는 래즈에 대해서 벨소리보다 더 흥미로운 서비스라고 평가하고 있다. (“PhoneBites is introducing a product that is more entertaining and lucrative than ring tones. We think it is a slam dunk sale to any young person with a cell pohone.”)
우리나라 기업들의 기회는?
사실 미국의 자본 시장은 최근까지만 해도 모바일 엔터테인먼트 쪽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아 왔다. 대중교통을 거의 이용하지 않아 킬링타임이 별로 발생하지 않고, 휴대폰 스펙 역시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미국의 라이프스타일상 휴대폰으로 통화 외에 별다른 것을 즐기는 문화가 별로 정착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미국 시장은 모바일 엔터테인먼트의 중심 시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실리콘밸리의 자본 시장이 모바일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점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리콘 밸리의 자본시장이 모바일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점점 눈을 들일수록, 폰바이츠처럼 모바일을 아이템으로 해서 벤처투자를 받는 예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이 대목에서, 혹시 우리나라 기업들이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없을지 생각해 본다. 사실 우리 기업들이 100원을 투자받으면, 비슷한 규모와 실력의 미국 기업들은 단지 미국 기업이라는 이유로 1,000원을 투자받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시장이 우리나라보다 20배 정도 큰 규모임을 감안할 때, 단순한 비교는 힘들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에 억울(?)해 하기보다는, 빨리 우리나라 기업들이 해외로 성공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기업들이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인정받고, 현지의 벤처투자도 이끌어 낼 수 있는 기업들로 성장했으면 한다. 한때 미국의 VC 들은 자동차로 사무실을 방문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면 절대로 투자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으나, 요새는 이스라엘 회사나 중국 회사들의 경우 미국에서 직접 투자를 유치해 내는 경우도 간혹 보이곤 한다.
얼마 전 신문기사에는 국내 회사 현지 인큐베이션 오피스인 “아이팍 (iPARK)”에 입주한 기업들이 총 8,500만불의 연간 매출을 기록하며 이제 수확을 거둘 시기가 왔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이러한 성공을 이어가서, 실리콘밸리의 저명한 벤처캐피털리스트가 국내의 모바일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투자하면서, 가이 가와사키가 열정적으로 폰바이츠를 홍보했던 것만큼 열띤 칭찬을 늘어놓는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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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