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6.28 07:55    
 
1999년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집사람과 내가 살었던 아파트는 Broadway 112가에 있는 스튜디오 아파트 3층으로 4면이 건물에 둘러싸여 있어 날씨가 맑은지 흐린지 보려면 목을 창으로 쭉빼서 하늘을 봐야 했다. 하루종일 해가 거의 들지 않기 때문에 낮에도 등을 켜야 했고 마루와 주방, 욕실이 있는 작은 방이었지만 우리는 행복하게 지냈다.

학교 근처에는 프랑스, 이태리, 일본, 한국, 중국, 인도, 그리스 식당까지 다양한 국적의 식당이 있어서 저녁 해먹기가 귀찮을 때는 한국식당 '밀'에서 떡복기를 시켜먹거나 columbia cottage라는 중국식당에서 적당히 요리를 한두개 시켜서 마루바닥에 놓고 먹곤 했다.

하루는 집사람이 코리안 타운에서 한국 영화를 몇개 빌려왔다. 그중의 하나가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였다.

집사람이 한석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길건너 아파트에 사는 친구네 집으로 놀러가고 영화는 거의 나 혼자서 보게되었다. 한석규, 심은하가 주연으로 나오는 시한부 인생의 사진사와 주차단속원의 사랑이야기였다.

흔한 소재다. 몇몇 설정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정겹고 평범한 소도시의 풍경, 대사를 최대한 절제하면서 배우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표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시한부 인생을 다룬 영화이긴 하지만 구질구질한 신파같은 장면은 하나도 없고, 주인공이 환자이지만 병원한번 영화에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한석규의 죽음도 간단한 영정하나로 처리되고 심은하의 한석규에 대한 사랑과 미움의 감정도 사진관 유리창으로 던진 돌멩이 하나로 처리된다.

특히 마음에 와닿는 것은 한석규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흘러나오는 김창완의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라는 음악이었다. 아무런 대사도 없이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한석규의 시선만으로 과거의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감정과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잔잔히 그려내고 장면은 이영화의 백미이다.

나도 대학시절, 아무 계획도 없이 아무 버스나 타고 다니면서 종종 몽상이 잠긴적이 있었다. 일부러 버스를 타고 시청앞으로 가서 덕수궁 뒤쪽 숲안 벤취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이슬비 내리는 날 종묘를 걸으며 고즈넉한 분위기에도 젖곤 했다.

나의 이러한 버릇은 직장에 취직하고 나서도 변하지 않아 퇴근길 세종문화회관을 지나가다가 콜라하나를 들고 문화회관 계단 맨 위에 앉아 지나가는 버스와 사람들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초등학교때 즐거웠던 추억, 고등학교와 재수시절의 괴로웠던 시간들, 대학교때 철모르게 지내던 시절, 직장에서 사귀다가 헤어지게된 여자친구와의 가슴아픈 추억들을 생각하면서.

때로는 바쁜 시간중에서도 가끔식 정지해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