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 사람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20대에 멋도 모르고 많이 읽은 시이다.
40대에 다시 읽으니
더 깊은 새로운 느낌이 든다.
최소한 40대 중반 이상이 된 분이
경륜에서 나오는 마음에서 지은 시 같은데,
놀라운 것은 이 시를 지은 박인환 시인도
겨우 만 29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도
아무런 희망이 없는 시기에서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할 수 있는지.
멋쟁이 댄디보이었던
박인환은 만 29세에
약물과다 복용으로 사실상 자살을 한다.
지금 그 사람을 잊었지만
내가 봤던 그녀의 눈동자, 느꼈던 그 입술의 감촉은
영원히 내 가슴에 있을 것이다.
이제는 왠만한 일에는 감동받지도 않고
놀라지 않는 식어버린 내 가슴에.
한마디로 뉴욕은 별로 바뀐 것이 없다.
마치 10년전 과거를 다녀온 기분이다.
Tom's Restaurant, Columbia cottage, West end, Mill, 우리가 다니던 교회,
SIPA 도서관, 우리가 살던 542 west, Van cortlands park, 지하철 1호선,
Times Square, Soho, Moma 모두다 거의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없다는 것.
같은 공간에는 다른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뉴욕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했다.
예전에 살던 그동네로 가면 얼마나 즐거울까하고.
물론 반갑기는 했다. 하지만 껍데기 뿐.
건물과 자리는 그대로인데 내가 사는 공간은 아니였다.
뉴욕에 살때는 42가와 학교, 그리고 소호, 냄새나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외국에 있다는 감정이 무뎌졌었다. 여기가 외국이기는 하지만
집사람과 함께 있었고 내가 아는 유학생들로 둘러싸여진 나만의 공간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낯설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워싱턴과 뉴욕이 마치 머나먼 외국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한국과 워싱턴보다 뉴욕과 워싱턴이 더 멀다고 할까?
그러면 뉴욕에 98년부터 같이 살던 사람들은 어떨까?
아마도 한국에 계속 살었던 사람들처럼 무덤덤할 것 같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9시되면 출근하고
직장사람들과 이야기하다 점심식사하고,
퇴근시간이 되면 집에와서 애들과 가족들과 생활하는
너무나도 익숙해서 마치 한국에 사는 것과 같은..
어떻게 보면 나는 미국이 아니라
미국의 워싱턴, 워싱턴안의 한국에 살고 있었나보다
미국에서 지낸다는 것을 망각하고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환경에서
단지 가끔씩 영어만 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예전과 10년전과 달리 더 이상
이 생활이 재미없다는 것이다.
소호 거리를 걸어보고, 5번가를 가보고
록펠러 센터에 가보아도
가족이 없는 나는 공허할 뿐..
다시 보면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라
가족들을 이끌고 가야하는 가장으로서
4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있는
4명의 식솔을 리어카에 싣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하는
가장인 것이다.
나 혼자서 고갯길을 올라가는 것도 힘든데
이제는 두 손에 자식들과 어깨에는 막내를 업고
올라가야하는 가장인 것이다.
내가 살았던 공간을 찾아가는 추억의 여행이었지만
내가 어떤 상황인지, 내가 뭘 해야하는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결정지워지는 나
진정한 나의 재산이 무엇인지 알게되는 의미있는 여행이었다.
결국 사는 것이란 내가 가져왔던 사람들을 계속 유지하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어가며
돈독히 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사람이라도 잃는 것. 그것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과 같다.
건물, 거리, 돈, 자동차 그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소유주가 바뀌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