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저편으로 약간 떨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15년 만인가.
음성을 듣는 순간 그녀인 것을 직감했다.
그녀와 헤어진후
뉴욕-서울-벨기에-스리랑카를 거쳐 한국에 돌아와
10년이 지나 세아이의 아빠가 되어서야
겨우 그녀에 대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혹시나 길가다 마주치지는 않을까?
이제 주름살도 많아지고 살도 좀 붙었겠지?
다시 만나면 뭐라고 하지?
쓸데없는 걱정도 많이 했다.
1998년 봄.
압구정 까페에서
'이젠 오빠 만날일 없을꺼야' 하고
울면서 헤어진 그녀가 스스로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예쁘고, 집도 부자고, Ivy League MBA출신에, 의사 남편에, 금융회사 이사까지 해 봐서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그녀가 왜 내게 전화한 걸까?
이제 나이가 들어서 감각이 무뎌진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녀의 목소리에 쿨 한척 잘 대응한 것 같다.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뭘 도와줄까?"
그녀는 전화걸기까지 무척 망설였단다.
어색하게 머뭇머뭇 거리다가 필요한 것을 물어본다.
나는 정신없이 이것저것 내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필요없는 내용까지 다 말해준다.
친절한 나의 태도에 마음이 놓였는지
그녀는 고마워 하며 언제 점심이나 같이하자고 한다.
나도 시간되면 연락하자며 같이 아는 친구까지 끼워 3명이서 만나자고 했다.
둘이서만 만나면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것이 많다.
사랑했지만
나는 연애 경험이 전무했기에 배려하는 마음도 없이
매사를 내 고집대로 하려했고
몇 번을 헤어지면서
그녀를 많이 울렸고
나를 원수처럼 여기고 떠나갔다.
울면서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지금까지 내 머리 어디엔가 무거운 쇠덩어리 처럼 박혀있었던 것 같다.
언제 그녀가 다시 전화를 해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만나게 된다면
"미안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지만 사랑했었다고"도
퇴근하려는 데 또 핸드폰이 울린다.
7살난 막내 딸이다.
"아빠 오늘 퇴근할 때 과자 사와"
"뭘 사다 줄까?"
"홈런볼 이랑, 칸초랑, 엄마 좋아하는 맛동산도"
"알았어"
과자 봉지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토끼같은 딸 둘, 아들이 반겨 맞아준다.
내가 아니라 과자를.
오늘은 참 고마운 날이다.
